인생이 내게 준 선물 (11) - 청포도 익어가는 7월을 열며

나의 교단일기 /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이미선 승인 2021.07.02 07:36 | 최종 수정 2021.07.02 08:06 의견 0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7월이 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시(詩), 이육사님의 ‘청포도’다. 일상을 벗어나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마을로 찾아가 뜻맞는 사람들과 마스크 벗고 두 손을 함뿍 적시며 청포도 따 먹고 깔깔거리며 웃고 싶다. 은쟁반이 준비되지 않더라도.

* 색깔이 있는 아침 시간

발령 첫 해부터 한 3년간은 무려 열세 개 반을 주당 2시간씩 26시간이나 담당해 전체 교사 중에서 가장 수업시수가 많았다. 요즘 선생님들은 주당 평균 18시간 정도 수업을 한다. 급당 학생 수도 그때는 60명이 넘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50명, 40명, 30명 이제는 25명 정도로 줄어들고 있다. 숫자로만 보면 엄청나게 좋아진 환경이다.

그러나 숫자로만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걸 교사들은 안다. 그 시절에는 아이들이나 부모님들이 학교를 믿어주고 맡겨주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아이들도 부모님들도 예전 같지 않다. 개성도 강해지고 주인의식, 인권 의식도 매우 높아져 각자의 생각이 중요해지고 목소리도 커졌다. 한편으로는 참 바람직한 일인데 교사로서의 생활은 녹녹치가 않다.

초임 교사 시절 수학여행 사진ㅡ한 반에 학생 수가 65명이던 시절
초임 교사 때 수학여행 사진. 한 반의 학생 수가 65명이던 시절이다.

그 시절, 똑같은 내용을 13개 반이나 들어가 수업을 하다 보니 내가 먼저 지쳤다. 한 네 번째 반에 들어가 수업하다 보면 앵무새가 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아이들이 다 다르니 힘을 내어서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2년째부터 수업 방식을 다양하게 바꾸어보았다. 묻고 답하기 수업, 토론식 수업, 프로젝튼 수업 등. 처음에는 경험이 없어 수업이 산만하고 힘들었지만, 경륜이 쌓이면서 차츰 내 나름의 수업 방식을 찾고 수업 혁신을 할 수 있었다.

토론식이나 프로젝트 수업을 많이 하면서 아이들과 직접 소통하는 시간이 많아져 아이들의 생각을 읽고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 도덕 교과는 실생활과 연계된 소재가 많다. 사직여중 교사 시절 ‘학교생활’ 단원에서 아이들이 조사한 내용을 발표했는데, 열 개의 반이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학교 가고 싶은 날’ 1위에서 5위, ‘학교 가기 싫은 날’ 1위부터 5위까지 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들으면서 나는 고심이 깊어졌다. 학교 오고 싶은 날이 ‘없다’가 1, 2위이거나 5위권 내에 모든 반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학교가 이렇게나 오고 싶지 않은 곳이라니. 이 땅의 교사로서 좌절감이 생겼다. 이 일을 어쩌나, 어떻게 해야 아이들에게 학교를 오고 싶은 곳으로 만들까?

그래, 일단 내 수업만이라도, 내가 맡은 학급이라도 바꾸어 보자. 배움이 즐겁고 배움을 통해 가치를 찾고 함께 성장하는 수업을 해보자. 우리 반이라도 아이들 중심으로 경영해보자. 이렇게 마음을 먹고 수업 방식을 더 고민하고 학급경영도 달리 시도해 보았다. 수업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아이들과 행복했던 학급경영 중 색깔이 있는 아침 자습 시간, 아이들이 직접 하는 종례 시간을 소개하고자 한다.

1998년 교육연수원에서 필자의 수업과 학급경영 사례 연수를 들은 고등학교 교사가 교육논단에 글을 실은 내용
1998년 교육연수원에서 필자의 수업과 학급경영 사례 연수를 들은 고등학교 교사가 교육논단에 실은 글.

그 당시 대부분의 학급에서는 아침 자습 시간에 영어 듣기를 하거나 독서 시간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필자는 아이들 의견을 받아서 ‘색깔이 있는 아침’을 열기로 했다. 월요일은 주말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는 아침, 화요일은 좋아하는 노래를 같이 부르거나 좋은 음악을 듣는 아침, 수요일은 시가 있는 아침, 목요일은 책 읽는 아침, 금요일은 일주일을 돌아보며 글쓰기 혹은 다음 주에 대해 계획을 세우는 아침으로.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시(詩)와 노래가 늘어났다. 이육사님의 ‘청포도’도 그 시절 아이들과 나누었던 시(詩)이다. 이 시간이 좋아 학교 오는 것도 즐거워졌다고 하는 아이들이 늘어나 참 다행이었다.

종례 시간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번호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아이들이 주체가 되어 직접 진행해보았다. 발표하기가 부담스러운 아이를 위해 다양한 방식을 제시했다. 노래를 불러도 되고 춤을 추어도 되고,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되고, 좋아하는 노래 한 곡 그냥 틀어주기만 해도 되고, 요리하는 방법을 알려주어도 되고, 악기를 연주해도 되고, 아니면 건의 사항을 말해도 된다고. 덕분에 우리 반 종례는 항상 늦었지만, 차츰 다른 반 아이들이 부러워하게 되고, 처음에는 투덜거렸던 아이들도 직접 참여하게 되고 진솔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즐거워했다. 때로는 큰 소리로 웃고 어떤 날은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다 보니 학년을 마치는 종업식 날, 졸업식도 아닌데 우리 반 아이들은 헤어짐이 아쉬워 눈이 붓도록 울기도 했다.

이렇게 함께 한 아이들도 어느새 마흔이 넘어 노래 가사처럼 아기엄마가 되었거나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들 살고 있겠지.

어디선가 나처럼 7월을 열면서 ‘청포도’를 읊고 있을 아이도 있을 것만 같다.

이미선 소장

◇ 이미선 소장은 

▷중등교사 22년 
▷부산시교육청 장학관 
▷중학교 교장 
▷교육학 박사 
▷현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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