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이 없는 날들 속에 나와 너는 지쳐가고
또 다른 행동으로 또 다른 말들로 스스로를 안심시키지.
인정함이 많을수록 새로움은 점점 더 멀어지고
그저 왔다 갔다 시계추와 같이 매일매일 흔들리겠지.”
-김광석의 ‘일어나’ 중에서
살아있다면 콘서트에 꼭 가보고 싶은 가수 김광석, 그의 노래는 마음 깊은 곳의 외로움과 슬픔에 닿아서인지 듣고 있으면 와락 눈물이 날 때가 있다. 일이 잘 안될 때, 울고 싶을 때, 누군가 그리워질 때면 김광석 노래를 듣는다. 김광석 노래는 떼창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그의 목소리에 오롯이 빠져들고 싶은 노래다.
돌아보면 나는 참 용기가 있었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물정을 모른다고 해야 할지.....아무튼 아이들을 위한 일이고 교육적으로 의미가 크다 판단되면 앞뒤 재어 보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겁 없이 시도한 교사였다. 이런저런 규정을 알았거나, 이모저모를 따져 생각했더라면 실행하기 어려운 시도를 여러 번 했었다. 후에 규정을 알고나니 ‘아이쿠!’ 싶기도 했지만, 김광석의 노래처럼 ‘인정함이 많았다면 새로움도 멀어졌을 것’임은 분명하다.
방학을 할 즈음에 계획을 짜보라고 하면 아이들은 꼭 묻는다. “선생님은 방학 때 뭐하세요? 우리랑 같이 놀러가요.” “우리를 엄마의 잔소리로부터 하루라도 좀 해방시켜 주세요. 제발....” 이런 아이들을 바램을 외면하지 못해 여러 번 캠프, 문화유산 답사 등을 실행했다. 처음에는 반 전체가 다 가기를 희망해 전세버스를 대절까지 하는데, 막상 당일이 되면 이런저런 이유로 계획한 인원의 2/3정도 밖에 모이지 않아 차질은 있었지만 ‘단 한 명이라도’에 의미를 두었던 나는 교사 시절 거의 매년 이런 행사(?)를 치렀다.
교사로 발령받은 초기 한 3년간은 철없는 중학교 아이들만큼이나 나도 서툴러서 시행착오가 많았다. 발령받은 첫해 2학년 수업을 하다가 아이들은 3학년이 되고 난 1학년 담임을 맡게 되어 3학년 아이들과는 수업에서도 학급에서도 만날 수가 없었다. 같이 수업할 때는 애를 먹이고 말도 안 듣던 녀석들이 헤어지고 나니 아쉬운지 교무실 문을 빼꼼히 열고 나에게 미소만 짓고 가거나, 복도에서 만나면 그렇게나 반가워하고 쫓아와서 인사를 해 행복했다.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혼자 미소를 짓는다. 이제는 아이가 아니라 다들 중년의 나이지만 철없던 중학생으로서의 기억이 강해 중년의 제자를 만나도 나에게는 아이 같다. 어떤 아이는 지금도 만나고, 건너 건너 소식을 듣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 소식은 알지 못한 채 세월이 흐른다. 예전에 어떤 선배님이 교사 생활을 하면서 한 해에 한 명씩만 남아도 30년 교직 생활을 하면 제자가 30명이라고 해서 ‘교사를 하면서 그 정도 아이도 남지 않을 수가 있나’ 생각했지만, 살아갈수록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안다.
교직 3년째 되던 해, 수업에서 만난 아이들이 다음 해 못 만나게 되자, 기특하게도 7명의 아이들이 찾아와 독서토론 동아리를 만들테니 지도교사가 되어달라고 요청해 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수락했고, 부산대학교 인근에서 화실을 하는 고등학교 동창네에서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오후에 모여서 해 저물도록 독서토론을 했었다. 이 독서 동아리에 참여하던 아이들이 여름방학이 되자 1박 2일 문화유산 답사를 제안해왔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코스도 짜고 준비도 다 할테니 그저 지도교사로 참여만 하면 된다고 해서 그 아이들을 믿고 나섰는데 얼마나 무모한 도전이었는지 금방 드러났다. 언양에서 밀양으로 넘어가는 길이었는데 그때는 그 길로 가는 버스가 없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여름 땡볕에 열기로 발바닥까지 따끈따끈한 길을 4km나 땀을 뻘뻘 흘리며 걸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게 무슨 계획인가 싶고 이래저래 불편하기 그지없었지만, 아이들이 요리하고 텐트를 치고 마냥 행복해하는 걸 보면서 ‘그래, 이거면 됐지.’ 싶었다.
이후로도 방학 때면, 희망하는 아이들을 모집하여 자비를 들여가며 전세 버스를 대절해서 경주 문화유산 답사를 다녀오기도 했고, 아이들이 적게 모이면 뜻 맞는 선생님들과 자가용으로 아이들을 태우고 겁도 없이 다녔다. 또 학교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1박 2일 여름 캠프도 하고, 금정산 달빛 산행도 했다. 내 돈 들여가며 귀찮을 법도 한 일들을 몇 년이나 한 걸 보면, 스스로 좋아서 했으니 그랬지, 누가 시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행복한 자발성의 힘!’ 이란 바로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자발성’은 힘이 세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마음을 내어 어떤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터전을 마련해주고 기다려주고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아주 작은 사고도 한 번 일어나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었지만,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위험하기도 한 일이었음을 전문직 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알고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도 받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그 시절 나를 두고 한 말 같았다. 그런 용기들은 어디서 왔을까? 그 시절 나에게는 법이나 규정보다 아이들이 중심이었다. 진실은 통하기 마련이라고, 거짓을 이길 수 있다고, 결국은 승리한다고 스스로 믿으며. 무엇보다 나는 내가 만약 억울한 일을 당한다면 내 뒤에는 나를 믿고 지지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믿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무슨 힘이 있었을까 싶다. 진짜 무슨 일이 있었다면 아이들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오래도록 아이들을 내 든든한 버팀목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순진하기보다 철없는 교사였다. 그 아이들은 모두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그리움으로 김광석의 ‘거리에서’ 노래를 다시 듣는다.
“ 거리에 가로등 불이 하나, 둘씩 켜지고
검붉은 노을 너머 또 하루가 저물 땐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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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그곳으로 떠나 버린 후
사랑의 슬픈 추억은 소리 없이 흩어져
이젠 그대 모습도 함께 나눈 사랑도
더딘 시간 속에 잊혀져 가요.”
◇ 이미선 소장 : ▷중등교사 22년 ▷부산시교육청 장학관 ▷중학교 교장 ▷교육학 박사 ▷현 부산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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