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66) 하마터면, 서경온
손현숙
승인
2022.09.02 17:26 | 최종 수정 2022.09.06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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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서경온
육중하게 내딛는 코끼리 발걸음 사이
재빠르게 피해 달아나는 녹색 도마뱀
질주하다가 바닷가 면한 낭떠러지
절벽 앞에서 급정거한 붉은 자동차
붕괴 직전 백화점 문을 나서서 귀가 했던
그해 여름날 저녁의 검은 실루엣
이쯤에서 돌아다 보니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던 일 많이 있었다
믜리도 괴리도 없이 맞아서 우니노라*
좋아하는 한 소절 부르지는 못했지만
‘하마터면’의 길목마다 지켜 서 있다가
아슬한 국면에서 잡아주던 손길
이제야 느낀다, 그대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내내 잊고 살 뻔했는데…
*청산별곡 중에서
서경온 시집 《하늘의 물감》을 읽었다. ‘현대시학’. 2022.
서경온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청산별곡 “어듸라 던지던 돌코/누리라 마치던 돌코/믜리도 괴리도 업시/마져서 우니노라”를 혀끝에 올려본다. 타인이 던진 돌에 이유 없이 맞아 우는 일이 수두룩 빽빽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워하며, 사랑하며, 울며, 불며, 함께 살아가는 오늘, 여기. 당신은 무사하신지? 시인은 삶의 우연 속에서 ‘하마터면’ 무너질 뻔한 순간들을 관념이나 기교 없이 발화한다. 내 통제 영역 밖에 있는 무엇을 담담하게 그린다. 그것은 그 어떤 순간에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도움으로 오늘 여기, 말짱하게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질문. 그렇게 시인의 시편들은 보드랍지만 올곧아서 흩어짐이 없다. 무엇보다 ‘하마터면’ 스칠뻔했던 가을 초, 느닷없이 하늘이 높다.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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