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70)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때, 정영선

손현숙 승인 2022.10.07 14:43 | 최종 수정 2022.10.13 10:50 의견 0
시인 정영선은 1995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 시집 외에도 《장미라는 이름의 동멩이를 가지고 있다》 《콩에서 콩나물까지의 거리》 《나의 해바라기가 가고 싶은 곳》을 펴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때
                                           
정영선

 

 

무늬목으로 가린 골목 저쪽에 그는 살고, 나는 이쪽에 산다
동에서 서만큼이나 먼 우리의 양극을
양팔 벌려 안는 은행나무가 거기 서 있다

늦가을 비오면
우수수 쏟아지는 은행잎 비를 우산 받고 가는
뒷모습을 보인다 그는

오고 간 아픈 말들
빙벽을 사이에 둔 애정이
가을 외투를 한 겹 껴입는 기억은 아름답다
핸드폰이 불러오는 돌담을 넘는 꽃나무 사진처럼

등의 빨간 방울을 본 적 없어
무당벌레만 모르는 무당벌레의 무늬처럼

우리 사는 아름다음을 우리는 모를 때가 있지 않을까
의문이 든다


*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때』 : 샤를 패팽이 쓴 책 제목

정영선 시인

 

정영선 시집 《누군가의 꿈속으로 호출될 때 누구는 내 꿈을 꿀까》을 읽었다. ‘파란’. 2022.

정영선 시인의 화자는 의문과 의혹 속에서도 아름다움에 관한 사색이 끈질기다. 확신이 없어도 있어도 그의 발걸음은 아름다움 쪽으로 기운다. 나, 화자인 시인은 지금 이쪽에, 그리움의 그는 저쪽에 산다. 이쪽과 저쪽의 공간 개념은 ‘함께’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합산이 불가하지만,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만큼에서는 내밀하다. 저들은 다가오거나 다가서지는 못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내어주는 그만큼. 당신만이 소유하는 아름다운 땅. 내 몸의 오지를 그에게 내어주는 일. 혹시 그것이 시인이 추구하는 구원이 아닐까. 비록 뒷모습만을 허락하는 당신이라 해도.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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