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67) 비설*, 홍산희
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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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7 10:44 | 최종 수정 2022.09.19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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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설*
홍산희
1949년 1월 초토화 작전이 벌어질 때 봉개동 변병생
(호적명: 변병옥, 당시 25살) 여인과 그의 어린 딸이
거친오름 동쪽 눈밭에서 희생되었다.
웡이자랑 웡이자랑 착한 우리 아가야
어멍 품에 잠들어라 웡이자랑 웡이자랑
어멍
눈이 내려요
어멍 머리수건에 하얀 꽃잎 쌓여요
꽃댕강나무 꽃송이 같아요
어멍
눈물이 얼어요
나를 안은 어멍 품이 뜨겁게 얼어가요
나는 어멍 품에 잠들어요
웡이자랑 웡이자랑 순하고 순한 아가야
한잠 깨면 아방 올까 웡이자랑 웡이자랑
어멍
하얀 눈이 포근한 이불 같아요
우리를 덮는 하얀 무덤
백 년이면 녹을까요?
어멍
또 봄이 와요
거친오름 눈 위에 붉은 동백 떨어져요
아방 오는 발자국 같아요
* 제주 4·3평화공원 상징조형물.
홍산희 시집 《속솜ᄒᆞ라》를 읽었다. ‘현대시학’. 2022.
제주에 가면 ‘4·3 평화공원’이 있다. 그곳에 발을 딛는 순간 누구라도 느끼는 비장함. 아니다, 그것보다는 아직도 해결되거나 풀어지지 않은 비애가 더 짙게 느껴지는 곳. 누구도 입을 열어 그때의 그 사건을 이야기하지 못할 때, 시인은 시로서만 혹은 시이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은 “우리를 덮는 하얀 무덤/ 백 년이면 녹을까요?”처럼 제주 4·3 사건은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서 민간인 대 학살극이었음은 자명하다. 그런데 시인은 그런 거시적 담론은 언급하지 않은 채 처연하게 서사를 풀어간다. 유령 화자를 동원하여 그때의 그 이야기를 현재 진행형으로 그린다. 주체가 둘이 등장하는 위의 시에서 죽은 원혼들은 여전히 여리고 숭고하다. 아기 영혼은 흠도 티도 없이 어멍을 기다리고. 어멍은 여전히 “웡이자랑 웡이자랑” 자장가를 부른다. 어쩌랴, 죽어서도 죽은 줄도 모르고 무주공산을 떠도는 원혼. 저들은 아직 저가 죽은 줄도 모르고 여전히 여기에 살아있다.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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