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62) 발 없는 발처럼 꽃이 피고

손현숙 승인 2022.07.16 09:53 | 최종 수정 2022.07.18 10:22 의견 0
손현숙 시인

발 없는 발처럼 꽃이 피고
                                                 손현숙

 

나팔꽃 피고 나팔꽃 지고 나면, 분꽃 피고 분꽃 지고, 나비
가 팔랑 허공에 두어 개 동그라미 거는 사이, 어스름 저녁이
오면, 달맞이꽃 땅 위에 한 점 별로 뜨고, 밤, 강 건너 마을
채송화처럼 빛무리 흐드러져 흔들리고, 무늬지어 흐려질 때,
새들은 깃을 치고, 달맞이꽃 입술 꼭 다문 채, 새벽으로 스미
는 황도광, 나팔꽃 씨앗은 영글어 새까맣게 깨물려, 무서워라,
발 없는 발처럼 꽃 피고 또 피고….

2005년년 현대시학 11월호 신작 소시집

 

시작메모:

사랑이 문득, 고양이 발자국처럼 올까봐 도망치던 시절이 있었다. 내 뒷모습을 깊이 바라봐주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할까 봐 멈칫, 하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 무죄無罪한 것들은 결국 무사無事한 사랑, 그저 꽃이 피고 지는 일. 눈뜨면 당신에게 굿모닝, 입술 얌전하게 오므려 인사를 한다. 남쪽으로 창을 여시길. 이제 나팔꽃은 감았던 눈을 떠서 사람의 이름을 지어 부를 것이니. 여기 계신 모든 존재와 당신과 그리고 또 누구라도 오늘은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등 쓸어주고 싶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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