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57) 세잔에서 - 주저하지 말고, 설태수
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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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0 19:23 | 최종 수정 2022.06.13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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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에서- 주저하지 말고
설태수
“시가 뭐 대순가, 살 빠져서 흔들리면서
운동도 안하고 맨날 글만 붙들고...”
책 들고 나서는데 아내가 또 잔소리.
대수? 대수고 소수고 간에
시가 가릴 게 뭐 있나?
백색소음 자욱한 공간에서
『세잔』을 펼쳐든다.
‘주저하지 말고 색을 칠하라, 첫인상 확보가
중요하지. 자연에서는 소심해 하지 마라!
실수해도 대담해야 한다.’
‘시 앞에서는 소심해 하지 마라’도 통한다.
대수 소수를 넘어선 세계가 시경詩境.
밟히는 낙엽소리 잎들 우수수
단체로 개별로 그러나 몸짓은 각개전투.
아쉬울 게 도통 없다는 거다.
아무리 보고 있어도 망설임이 없다.
백 퍼센트 방심放心.
어딜 가든 대범한 가을이다.
설태수 시집 《빛들의 수다》을 읽었다. ‘예술가’. 2022.
시의 첫 줄은 신이 내린다고 한다. 시인은 그 첫 줄을 받아 쓰기 위해 몇 날 며칠, 혹은 몇 달을 몸부림친다. 그런데 그 첫 줄은 이상하게도 온갖 전투를 끝 낸 후, 방심처럼 강림하곤 한다. 시인들은 그렇게 시 쓰다 시들고, 시 쓰다 병들고, 시 쓰다 죽기도 한다. 시인은 아내의 잔걱정에 “시가 가릴 게 뭐 있나”로 꼿꼿하다. 얼마 전에 시가 도대체 뭐냐고. 시는 왜 그렇게 어렵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혼잣말로 대답했다. 신은 그렇게 쉽게 오시지 않더라고. 경계를 넘기란 목숨줄 하나 딱 내놓는 일이라고. 시인은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지 못해도 돌아온 사람이라고. 그쯤 돼야 시인이지. 그게 시詩지. 여기 설태수 시인이 그렇다. 지금 시인은 쬐끔 아프지만, “아쉬울 게 도통 없”다. 건강하다. 그래서 詩人이다.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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