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56) 숨죽여 우는 사람, 최정란

손현숙 승인 2022.06.04 09:55 | 최종 수정 2022.06.05 09:59 의견 0

숨죽여 우는 사람
                         최정란

 

 

어딘가 닿겠지요 닿지 않으면 어때요 자갈 길, 흙길, 모랫길, 풀밭 길, 길 위의 시간이 길어요 좁은 길, 불면을 부르는 길, 슬픈 일이 눈을 가득 채우는 길, 작은 골목과 거리와 바닷길, 산길, 들길을 오래 걸어요 우울과 명랑이 뒤섞인 길을 걸어요 슬픈 일은 일기에 숨기고 기쁜 일만 겉으로 꺼내 놓아요 일찍 철든 유쾌한 사람으로 비친다면, 그건 순전히 슬픔과 우울을 빨아먹은 언어덕분이지요 눈물이 우리 삶을 고귀하게 만든다는 말일까요 떨어진 눈물자국은 왕관모양이고요 시인은 우는 사람, 다시 우는 사람, 혼자 통곡하는 사람, 누군가 들을까 숨죽여 우는 사람일까요

최정란 시집 《독거소녀 삐삐》을 읽었다. ‘상상인 시선 031’. 2022.

시인의 또 다른 이름은 곡비. 곡비는 극한의 직업이다. 대신 울어주는 사람. 누구를 위해 울음을 운다는 것은 몸으로 몸을 고스란히 받겠다는 결심.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살아주겠다는 주먹. 뭘까, 가장 깊은 수렁 속에서도 찬란하게 언어를 길어 올리고 싶은 저, 심정. 길의 끝까지 가보겠다는 이, 무모함. 희망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행동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그 후에 셈을 하거나 말거나, 울고 또 울어서 통곡으로 살아도 좋겠다는 시인.

 

쬐끔 슬프고, 그리대 아직은 좋다 ... 어머니와 필자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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