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59) 다각형의 한 방울, 이향란

손현숙 승인 2022.06.25 01:35 | 최종 수정 2022.06.27 09:13 의견 0

다각형의 한 방울
                             이향란

 

 

셋 이상의 선분으로 이루어진
다각형

삼각형이었다가 사각형이었다가
오각형 육각형으로 변형될 수 있는

딸이었다가 애인이었다가
아내, 엄마, 며느리 혹은 이모나 고모
저 바깥 이름들 뒤에 붙는 기타 존칭어처럼

나는 나이지만 타인이기도 하여
내가 내게서 멀어지거나 지우고 버려도
끝끝내 나를 줍는 사람들

죽었다가도 재생을 일삼는
점이나 선의 탄력적인 도형

타인의 기억 속에 떨구어진
잉크 한 방울

이향란 시집 《뮤즈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을 읽었다. ‘천년의 시작’. 2022.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당신 혹은 당신들의 무엇이 아닌, 나의 나로 오롯이 살아가는 일. 혼자 걷고, 혼자 먹고, 이야기하면서도 기꺼이 저대로 돌아가는 세상. 엄마나 아내나 이모, 고모 애인이 아닌 그저 나 혼자만의 선분. 즉 단독자. 그런데 부드럽게 밤이 풀어져서 새벽이 돌아오듯, 당신, 당신, 또 그 뒤의 당신 얼굴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익숙한 얼굴. 결국 나는 어쩔 수 없는 타인의 연속이다.

시인은 섞이고 풀어지면서 살아가는 이 세속의 삶을 고체와 액체가 자연스럽게 섞여서 맺힌 다각형 한 방울로 명명한다. 그런데 마지막 행에서 일갈하는 “타인의 기억 속에 떨구어진” 나는 글쎄, 정말 나일까? 완전히 풀어져서 무화 되어버리는 잉크 한 방울. 오롯이 나는 나의 형태로는 끝끝내 돌아갈 수 없음을, 부드럽게, 아니 차갑게 관망할 뿐.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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