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道无知)의 채근담 읽기 (102 )문장은 기이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꼭 알맞을 뿐이요, 인품은 특이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본연 그대로일 뿐이다

허섭 승인 2021.04.10 12:35 | 최종 수정 2021.04.13 12:12 의견 0
겸재(謙齋) 정선(鄭敾 조선 1676~1759) -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79.2×138.2), 리움미술관

102 - 문장은 기이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꼭 알맞을 뿐이요, 인품은 특이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본연 그대로일 뿐이다

문장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달리 기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꼭 알맞을 뿐이요.

인품이 극진한 경지에 이르면 
달리 특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본연 그대로일 뿐이다.

做到(주도) : 도달함, ~에 이름.  做는 원래 作과 같은 뜻이다.
他(타) : 여기서는 부사어로 ‘달리’ 로 쓰임.
只是(지시) : 다만(단지) ~이다.
恰好(흡호) : 꼭 알맞음, 매우 적절함.  恰은 ‘아주 적당함’ 을 나타내는 말로 우리말로 옮기자면 ‘꼭’ 이나 ‘딱’ 에 해당한다.

당인(唐寅, 명, 1470~1523) - 도잠상국도(陶潛賞菊圖)

◆출전 관련 글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에

문장과 인품을 논함에 있어 늘 상기(想起)하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문질빈빈(文質彬彬)> 이다.

子曰(자왈) 質勝文則野(질승문즉야) 文勝質則史(문승질즉사) 文質彬彬 然後君子(문질빈빈 연후군자)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바탕이 꾸밈을 이기면 야(野)해지고, 꾸밈이 바탕을 이기면 사(史)해진다. 꾸밈과 바탕이 조화를 이룬 뒤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이를 넓게는 문학에 좁게는 문장론에 대입해 보면, 文質彬彬은 바탕(내용)과 꾸밈(형식)이 겸비되고 감정과 문식(文飾)이 함께 풍성하기를 주장한 이론이다. 질승문(質勝文)은 문채(文彩)가 없거나 문채가 부족한 상태로, 문장은 조야(粗野)하고 생동감이 떨어지게 되는데, 이는 좋은 문장이라고 할 수 없다. 반대로 문승질(文勝質)은 내용이 공허하고 다만 언사(言辭)만 화려하고 요란한 상태로, 문장은 부화(浮華)하기만 할 뿐인데, 이 또한 좋은 문장이라고 할 수 없다. 오직 '文質彬彬' 한 경우에만 꾸밈과 바탕이 조화를 이루어 내용과 형식이 통일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군자가 글을 쓸 때 지켜야 할 도리요 준칙이라는 말씀이다.

공자가 문질빈빈을 요구한 태도는 그가 일관되게 주장한 질문겸비(質文兼備)의 문예사상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는 일찍이 <말은 뜻을 나타내면 족하고, 문장은 말을 적어내면 족하다. - 言以足志 文以足言> 거나 <말에 꾸밈이 없으면 실행되어도 멀리가지 못한다. - 言之無文 行而不遠>, <감정은 믿음직스럽고자 힘쓰고, 언사는 교묘하고자 힘쓴다. - 情欲信 辭欲巧> 는 말씀도 남겼는데, 모두 문장 속에 文과 質이 함께 풍성하기를 주장한 것이다.

* 文은 원래 ‘무늬(무늬 紋)’ 를 뜻하는 글자였다. 우리가 ‘천문학(天文學)’ 이라 할 때, 천문(天文)은 하늘의 무늬로 바로 해와 달과 별을 칭하는 것이다. 文이 나중에 ‘글 - 人文’ 이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자, 다시 의미를 세분화 할 필요가 있어 원래의 ‘무늬’ 라는 뜻으로는 비단의 의미를 추가하여 紋이라는 글자를 다시 만들었으니 이를 문자학에서는 ‘재출자(再出字)’ 라 한다. 물결무늬인 汶도 마찬가지이다.

* 質은 원래 ‘바탕, 본질’ 을 뜻하며 ‘순박하다’ 는 긍정적 의미를 띠고 있다.

* 史는 일반적으로 ‘역사’ 라는 뜻으로 ‘가운데 中’ 에 ‘오른손 又’ 를 더하여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중정(中正), 즉 공평무사(公平無私)함을 요구한 글자이다. 그런데 이 史 자가 간혹 ‘지나치게 꾸미다’ 라는 의미로도 쓰이니, 여기서 史는 ‘겉만 번지르하고 실속이 없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 野는 원래 ‘들판’ 을 뜻하는 말로 ‘거칠고 촌스럽다’ 는 의미를 갖는다. 즉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예법과 격식을 갖추지 못한 ‘야만성(野蠻性)’ 을 뜻한다. 요즘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들판스럽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어찌하여 '섹시(sexy 色視)하다‘ 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을까? 야만인들은 나뭇잎이나 헝겊 조각이나 가죽 조각으로 몸을 대충 가리고 있으니 노출(露出)이 심할 수밖에…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야하다’ 는 말을 한자로 쓰라고 하면 대부분 ‘밤 夜’ 자를 쓸 것이다. 원래 ‘野하다’ 는 말이 가진 ‘원시적인 건강성’ - 생명력으로 충일한 그 건강미를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논어의 이 구절을 두고 나는 자꾸 공자께서 이어서 이런 말씀을 했을 것이라고 내 멋대로 상상하며 심지어는 그런 대목을 읽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공자께서 예(禮)와 악(樂)을 그리 중시하셨지만 어찌 그것이 인간의 본질 그 바탕을 떠나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連曰 (或)兩者擇一 (吾)捨文取野 寧野矣 (연왈 혹양자택일 오사문취야 녕야의)
- 이어서 말씀하시길, 누군가 나에게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나는 문을 버리고 야를 취할 것이야. 그래 차라리 야하고 말지.

추사 글씨 '사야'
추사 글씨 사야(史野), 관송미술관,  92.5 x 37.5 cm​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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