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 시인의 단시조 산책 (4) 어떤 조문 - 이영필

이광 승인 2021.11.10 11:37 | 최종 수정 2021.11.12 13:18 의견 0

 

어떤 조문
                             이영필

 

안경 낀 젊은이가 사진 속 웃고 있다

원인을 묻기 전에 무겁게 고개 숙인

아버지 허연 수염이 향불처럼 피고 있다

 

시인이 최근 상재한 시조집 《반구대 가는 길》에서 한 편을 다시 읽는다. 화자는 젊은 망자의 장례식장에서 조문하는 중이다. ‘안경 낀 젊은이’의 영정은 여러 추측을 낳는다. 먼저 작금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위험의 외주화'에 희생된 아르바이트생의 죽음이 연상된다. 인력시장에서 일용직으로 건설현장에 투입되어 사고를 당하는 사례도 있다. 영정 속의 안경이 은근히 망자를 학생으로 간주하게 한다. 하지만 최근의 사진이 아닐 수 있는 데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병사했을지도 모른다. 하나, 화자가 망자의 아버지와 지인인 듯하고 자식의 죽음에 대한 연유를 묻고자 한 걸 미루어볼 때 아무래도 돌연사일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아직 우리나라엔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하직하는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 나이든 노년층이거나 일에 미숙한 젊은 층의 희생이 많아 가슴 아픈 일이다. 취업준비생들은 부모에게 계속 용돈을 바랄 수 없어 일당을 벌러 나간다. 그럴 경우 안전보장 여부를 사전에 확인할 수 없다. 화자는 사망의 원인을 끝내 물어보지 못한 것 같다. 자식을 앞세운 사람 앞에서, ‘아버지 허연 수염이 향불처럼 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각 장을 한 행으로 처리하되 한 줄 띄운 행간은 독자에게 사유의 공간을 준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한 마디 거론 않으면서 독자로 하여금 사유의 시간을 갖게 하고, 자식을 잃은 아버지와 함께 고개 숙이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시가 지닌 작은 힘이다.

이광 시인
이광 시인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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