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 시인의 단시조 산책 (9) 미물 2제

이광 승인 2021.12.14 22:28 | 최종 수정 2021.12.16 13:41 의견 0

미물 2제
                            이 광

 

1. 지렁이

알다시피 얌전히 흙에 묻혀 사는 몸
내 딴엔 바깥세상 볼일 보러 나왔는데
유유히 짓밟고 가는 무정한 구둣발아

 

2. 집거미

반지하 구석방에 보금자리 꾸렸건만
분수맞게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
빗자루 눈 깜짝할 새 내 집 쓸어 가버렸다

 

필자의 초기작으로 퇴고에 관해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위 졸작은 미물을 주제로 쓴 단시조 두 편을 하나로 묶은 것이라 연시조에 속하지만 각 편마다 소제목이 붙은 단시조의 연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이를 택한 것은 노트에 남아 있는 습작과 등단 이후 퇴고를 거쳐 발표한 것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여줄 수 있어서이다.

먼저 <지렁이>는 한미 FTA 저지 시위를 하던 농민의 모습을 보고 쓴 것이지만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난 일이니 그냥 우리 주변의 약자로 생각하면 되겠다. 습작 원고에는 종장의 전구가 ‘왜 나를 밟고 가는가’ 하고 항의조의 진술로 되어 있다. 그게 ‘유유히 짓밟고 가는’이라는 묘사로 바뀌면서 ‘무정한 구둣발’의 이미지가 보다 선명해진다. 이미지가 직접적인 메시지보다 더욱 강렬하게 독자의 의식을 환기시킨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집거미>의 경우는 초장 전구가 바뀌었다. 처음엔 ‘빈방 하나 찾아서’라고 막연한 설명으로 시작했으나 ‘반지하 구석방에’라는 구체적인 표현이 들어가자 현장감이 확 살아난다. 좁은 골목에서 작은 창이 반쯤 지상에 걸쳐진 반지하 주택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시의 배경이 한눈에 그려질 때 독자는 시와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한 구절, 한 구절이 시적 형상화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염두에 두고 살펴야 한다. 퇴고란 바로 그 한 구절을 무두질하듯 다듬어가는 작업이다.

이광 시인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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