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 시인의 단시조 산책 (38) 낡은 선풍기 - 정희경

이광 승인 2022.07.06 09:10 | 최종 수정 2022.07.11 17:40 의견 0

낡은 선풍기
                    정희경

 

 

스위치를 넣으면

억수같이 내리는 비

덜덜덜 소리 풀어

눅눅함을 지운다

온종일

열나는 모터

갱년기가

거기 있다

 

정희경 시인의 <낡은 선풍기>를 읽는다. 무릇 시인들은 새것보다 낡고 오래된 것에서 시의 광맥을 캔다. 오랜 시간이 깃들어 있는 물건에는 군데군데 묻은 지문처럼 함께한 시간이 얼룩져 있다. 지난여름의 기억을 꺼내듯 한곳에 보관했다가 날이 더워지자 다시 찾는 선풍기, 이와 마주한 시인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초장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스위치를 넣’는 행위는 전자제품을 사용할 때 맨 먼저 취하는 동작이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는 한창 쏟아지는 소나기를 두고 흔히 쓰는 말이다. 두 개의 낯익은 표현이 서로 엮여 이룬 문장은 우리를 낯설게 한다. 독자는 제목에 한 번 더 눈길을 주며 낡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를 빗소리에 빗대었음을 인지한다. 시각과 더불어 청각적 이미지가 더해지는 연출이 돋보인다. 중장의 ‘덜덜덜’에서 ‘덜덜’은 주로 의태어로 쓰이는데 ‘덜’이 하나 더 잇따르자 의성어로서의 역할도 겸하며 선풍기가 낡았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한 ‘눅눅함’이란 감촉은 자연스럽게 장마철을 떠올리게 한다.

초장과 중장이 선풍기와의 대면으로 엮어졌다면 종장에선 선풍기를 통해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맞는다. 낡은 선풍기의 ‘온종일//열나는 모터’에서 갱년기를 겪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갱년기 증상… 어쩌랴, 세월은 병도 주지만 약도 되지 않던가. 다소 열 받더라도 눅눅함을 지우며 장마철 같은 갱년기를 이겨낼 수밖에.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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