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道无知)의 채근담 읽기 (330) - 사람을 피하면 이내 아상(我相)에 사로잡히고, 고요함에 집착할수록 동요(動搖)에 휘말리게 된다

허섭 승인 2021.11.25 21:10 | 최종 수정 2021.11.27 10:39 의견 0
330 오창석(吳昌碩 1844~1927) 홍매도(紅梅圖) 159.2+77 상해박물관
 오창석(吳昌碩, 1844~1927) - 홍매도(紅梅圖)

330 - 사람을 피하면 이내 아상(我相)에 사로잡히고, 고요함에 집착할수록 동요(動搖)에 휘말리게 된다. 

고요함을 즐기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자는 흔히 사람을 피해 고요함을 구한다.

그러나 이는 알지 못하는 것이라,
뜻이 사람 없음에 있으면 곧 아상에 사로잡히게 되며
마음이 고요함에 집착하면 이가 곧 동요의 근본임을 …

어찌 남과 나를 하나로 보고 동(動)과 정(靜)을 함께 잊는 경지에 이르리오.

  • 喜寂厭喧(희적염훤) : 고요함을 즐기고 시끄러움을 싫어함.
  • 往往(왕왕) : 자주, 흔히.
  • 我相(아상) : 망상에 의해 나타난 나를 참된 나로 보고 집착하는 것. 
  •  * 불교에서 말하는 사상(四相) 중의 하나이다.   후집 제 장 참조.
  • 心箸於靜(심착어정) : 마음이 고요함에 집착함. * 『채근담』에서는 ‘着(붙을 착)’ 자(字)를 거의 ‘著(지을 저/붙을 착)’ 으로 쓰고 있다.
  • 動根(동근) : 동요(動搖)의 근본.
  • 人我一視(인아일시) : 남(대상)과 나(주체)를 하나로 보고 차별을 두지 아니함.
  • ̖動靜兩忘(동정양망) : 동(動)과 정(靜) 둘 다를 잊음.
  • 的(적) : ~의, ~하는.  앞의 말을 뒷말을 수식하는 관형사로 만드는 접사의 기능을 갖고 있다. 우리말에서는 ‘관형적 조사(~의)’ 나 ‘관형형 어미(~ㄴ)에 해당한다.

※ 본문에서 不知에 걸리는 부분은〔意在無人~便是動根〕까지이다. 만일 不知와 意在無人을 붙여〔不知意在無人〕이라 하면 ‘뜻이 사람 없음에 있음을 알지 못하면’ 으로 새기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不知는〔意在無人 便成我相〕와〔心箸於靜 便是動根〕, 두 문장 모두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즉 <마음을 사람 없는 것에 두는 것이 곧 아상에 사로잡히는 것임을 모르며, 마음이 고요함에 집착하는 것이 곧 동요의 근본임을 모른다> 로 풀이해야 맞다.

* 대개의 번역본에서, 〔不知意在無人하면〕이라고 토를 달고서는 해석은 제대로 해놓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엄격히 말하자면 서로 맞지 않는 풀이가 될 것이다. 하여 필자는 〔不知케라〕라고 분명히 끊어서 토를 달아 不知에 걸리는 부분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330 오창석(吳昌碩 1844~1927) 매화도(梅花圖) 179.5+97.8
오창석(吳昌碩, 1844~1927) - 매화도(梅花圖) 

◈ 한유(韓愈 768~824)의 「원인(原人)」중에서

天者日月星辰之主也(천자일월성신지주야), 地者草木山川之主也(지자초목산천지주야), 人者夷狄禽獸之主也(인자이적금수지주야), 主而暴之(주이폭지), 不得其爲主之道矣(부득기위주지도의). 是故聖人一視而同仁(시고성인인시이동인), 篤近而擧遠(독근이거원).

- 하늘은 일월성신의 주인이고, 땅은 초목과 산천의 주인이며, 사람은 사방의 오랑캐와 온갖 금수의 주인이다. 주인이 (자신이 거느리는 것들에게) 난폭하게 구는 것은, 주인으로서 지켜야 할 바를 도를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만물을 피아(彼我)의 구별 없이) 하나로 보아 똑같이 사랑하고, 자신을 닦는 평범한 일부터 실천하여 그 덕이 멀리까지 미치게 한다.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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