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44 봄날은 간다 - 목월(木月)의 저녁놀, 그리고 구름에 달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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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6 14:27 | 최종 수정 2021.05.2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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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너무 더워 해가 지기를 기다려 산책을 나갔는데 이불뜰 한가운데서 참으로 황홀한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영남알프스의 주봉인 가지산을 중심으로 오목하게 분지를 이루는 가지산, 상운산, 문복산, 가지산의 1천m가 넘은 산맥 위로 황홀한 노을이 펼쳐진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박목월의 시 <나그네>의
술 익는 마을 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가 떠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아늑한 들판 끝의 어느 외딴집에서 비록 직접 담은 농주(農酒)는 아니더라도 힘들게 밭일을 하고 돌아온 영감을 위해 어느 할머니가 이 고장의 명물 ‘가지산 막걸리’ 한 병을 상에 올릴지도 모르고 길천공단에서 일과를 마치고온 스리랑카나 캄보디아 출신의 근로자가 오뎅이나 두부 같은 값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면서 저 노을을 보며 향수에 젖어도 좋을 것입니다.
언제나 황홀한 노을은 참으로 소중한 선물인 것 같습니다.
휴대폰으로 노을을 찍고 돌아서면서 기왕이면 이제 목월의 <나그네>에 나오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의 달이 좀 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한 10분을 더 걷자 마침내 명촌리 본 마을을 향한 길을 따라 주욱 이어진 전깃줄 위에 거짓말처럼 하얗고 가는 눈썹달이 떴습니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살아도 일부러 마음먹고 쳐다보지 않으면 별이나 초승달은 좀체 구경하기 힘들어 이 무슨 횡재인가 싶어 얼른 사진을 찍었지만 화폭을 가로지른 전깃줄이 현대문명의 족쇄인 것 같아 다시 한참을 걸었습니다.
아무 걸림도 없는 고래뜰 한가운데서 비로소 산과 하늘과 어둠과 별과 구름은 물론 마을의 불빛까지 정답게 자리 잡은 포근한 사진 한 장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며 황홀한 밤이었습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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