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재운 대기자의 '생각을 생각하다' (8) 마음의 단식
진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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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6 13:01 | 최종 수정 2021.07.18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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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책을 읽다보면 ‘심재(心齋)’라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글자 그대로는 ‘마음을 목욕시키다’입니다. 여기에 ‘마음을 굶기다’로 나만의 해석을 해봅니다. 단식은 수시로 해보지만 마음을 굶기는 것, 조금은 낯섭니다. 하지만 금방 훅 다가옵니다. 단식은 내 몸이 굶어도 죽지 않고 더 건강하게 치유된다는 믿음입니다. 마음을 굶기는 것 또한 내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면서, 마음이 더 건강해진다는 믿음입니다. 평소에는 내 고집대로 살다가도 가끔 마음을 굶겨줘야 내가 세상과 함께 진동하는 공명임을 깨치는 방법인 것이지요.
아침에 부산대 물리학 교수의 쿼크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입자의 최소 단위지만 홀로서는 절대 존재 할 수 없는 것을 두고 ‘쿼크의 구속문제‘라고 합니다. 물질이기는 하지만 홀로 존재할 수 없는 물질! 그 쿼크를 기본입자로 하는 세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확장해보면 우리 개개인도 이래저래 세상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래서 외로워 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존재 자체가 이미 연결을 기본으로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외로워합니다. 외로움이 전염병이 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외로움이 민주주의 최대의 적’이라고 합니다. 홀로 분리됐다고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결국 자신보다 못한 이들에게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며 혐오와 차별이 사회적 문제로 비화된다는 것입니다.
회사에 존경하는 후배가 진작 선물로 준 책을 뒤늦게 꺼집어 내 밤새 읽었습니다. ‘헬렌 니어링’의 『사랑 그리고 마무리』입니다. 100살 생일을 넘기고 죽어가는 자신의 남편에 대한 기록 부분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이의 칠십대는 노령이 아니었으며, 팔십대는 노쇠하지 않았고, 구십대는 망령이 들지 않았다. 그이의 정신은 팔십대 후반에도 여전히 분별 있고, 정확하며, 예민하여 여느 때처럼 강연하고, 책을 읽고 날마다 글을 썼다.’ ‘100세 생일 한 달 전 어느 날 그이가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먹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딱딱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이는 신중하게 목적을 갖고 떠날 시간과 방법을 선택했다. 그이는 단식으로 자기 몸을 벗고자 했다. 단식에 의한 죽음은 자살과 같은 난폭한 형식이 아니다. 그 죽음은 느리고 품위 있는 에너지의 고갈이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자. 스스로 원한 것이었다.’ 이 구절을 읽노라면 죽음을 맞는 100세 노인의 설렘과 호기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죽음이 외로움과 고독이 아니라 새로운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소년의 마음이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가 철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자연의 원리가 그렇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외로워하고 고독해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릴 적, 시골집에 삽살개를 키운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 이 놈의 수명은 8년을 넘긴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른 개들은 좀 컸다 싶으면 개장수들이 와서 데려갔기에 수명을 알 수는 없었으나, 이 삽살개만큼은 내가 개장수로부터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아침밥을 그대로 둔 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보지 못했습니다. 밤새 어디로 간 것이었다. 그 뒤 나는 동물이 죽을 시간이 오면 스스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상실감이나 외로움이나 고독감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냥 생애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죽음도 이럴진대 살아가는 과정이 외롭거나 고독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철저하도록 무서운 착각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리가 어떻든 많은 이들이 떨어져 있다는 소외감과 분리감으로 철저히 외로워합니다. 그 외로움으로 사는 이가 너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외로워하고 고독해 하는 것이 단순히 개인들의 문제로 몰아부칠 수만도 없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다큐멘터리 '위대한 비행'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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