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와 새들의 친구>들과 함께한 진우도에서의 하루
나는 새를 좋아한다. 새는 자유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환생이란 게 있다면 나는 새로, 그것도 바다를 비행하는 갈매기로 태어나고 싶다……. 내가 한 번씩 해보았던 상상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상과 말이 오늘 따라 왠지 공허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사실 새는 '자유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새가 경험하는 세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간이 만들어낸 이미지고 상징일 뿐이다. 이미지와 실재는 전혀 다른 물건이다. 새는 그 무슨 자유 때문이 아니라 다만 날 따름인 것이다. 새가 굳이 무언가를 위해 난다고 한다면 그것은 생존을 위해서, 혹은 생명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새는 누구이며 새와 나는 어떤 관계로 맺어져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된 데는 까닭이 없지 않다. 지지난 토요일, <습지와 새들의 친구>의 회원들과 함께 어울린 하루의 빛나는 순간들 때문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10월의 마지막 주말, <습지와 새들의 친구>(이하 '습새')가 낙동강 하구 진우도로 소풍을 떠납니다."
내 가슴을 울린 <습지와 새들의 친구>의 창립 선언문
'습새'의 웹사이트에 이 같은 공고가 나기 몇 주 전, 나는 '습새'의 코어(!) 활동가인 박중록 선생 ('습새' 전 대표, 대명여고 교사)에게 말했었다. "'습지와 새들의 친구'들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습지와 새를 만나러 가는 날 꼭 좀 끼워 주세요." 나 같은 문외한이 습지의 친구도 되고 새의 친구도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오랜 친구들의 친구부터 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은 온 것인데, 그 전에 나는 '습새'에 대한 공부를 조금이나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습새'>가 출범한 건 2000년 10월 8일의 일이다. 하지만 그 뿌리에는 환경운동연합 (1993)이 있었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산하 환경교육분과에서 출발(1992)하여 1995년에 발족한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환·생·교)이 있었다.
"습지가 없는 곳에 새가 없고, 새들이 사라진 곳에 우리 인간의 미래도 없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의 꿈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습지와 새들이 '친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이 같은 <'습새'>의 창립 선언문이 낭독된 곳은 "참으로 아름답던, 그러나 이제는 철저히 파괴되어버린 낙동강 하구 을숙도 광장"이었다. 그 일대는 "불과 몇 십 년 전 수 십 만 마리의 철새가 하늘의 해를 가렸다던, 동양최대의 철새 도래지라고 이름났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불과 수천 수 만 마리를 넘지 못하는 '잃어버린 낙원'으로 변해"버린 곳이었던 것이다. 그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낙동강 하구의 하늘을 바라보며 한 다짐은 소박하면서도 절절한 것이었다.
"우리들이 습지와 새들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습지와 새들을 우리들의 힘으로 지켜내겠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낙동강 하구와 진우도를 둘러보는 소풍에 끼게 된 10월의 마지막 주말은 <'습새'>가 출범한 지 18년이 지나서인 것이다. 18년 전에 이미 '잃어버린 낙원'이 되어버렸다는 낙동강 하구는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친구들과 함께 어떤 시간들을 견뎌야 했을까……? 집결 장소로 가는 동안 떠오른 생각이다.
개펄도 습지도 모두 매립해 고층 아파트 마구 세우면
우리 후손들은 행복해질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10월 27일 10시, 강서구 신호동 신호초등학교 정문. 모인 사람은 나를 포함해 모두 아홉 명이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진우도로 가는 선착장으로 5분 쯤 걸어갔는데 바다를 바라고 병풍처럼 서 있는 아파트 숲과 바다 사이엔 옛날에 비해 형편없이 쪼그라들었을 좁은 개펄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개펄도 습지도 모조리 매립해서 전망 좋다는 고층 아파트 마구 지어봐라. 아니 아예 시멘트로 다 발라 버리면 속이 시원할지도 몰라. 그러면 당신들, 아니 당신들의 자손들은 행복할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상도 뚜렷하지 않은, 아니 개발지상주의와 돈의 망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향한 것만은 분명한 저주의 말이 내 속에서 저도 모르게 올라왔다. (부산이라는 대도시 아파트에 사는 나도 내 저주의 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거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오래 기다리지 않아 엔진소리도 경쾌하게 파도를 가르며 한 소형배가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우리를 진우도에 데려주고 또 데리고 나올 배였다. 하늘은 높고 푸른데 마냥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부서지는 햇살에, 한 마디로 눈부신 풍광. 일행이 환히 웃는 선장에게 저마다 반가운 인사를 던지는 걸로 보아 진작 알고들 지내는 사이임에 틀림없었다. 과연 선장 박동욱 씨와 <습새>는 오랜 친구로서 그는 가덕도에 붙은 섬으로 정거 벽화 마을로도 유명한 눌차도의 주민이며 어부라 했다.
이름으로만 듣던 진우도. 배에서 내리자마자 수풀도 헤치고 하얗게 흔들리는 띠풀의 지대도 지나자 오래되고 텅 빈 벽돌 건물이 나타났는데 (옛날엔 고아원이었다고 했다) 그 마당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그곳을 빙 둘러서서 간단한 자기소개의 시간을 가졌다. 그 얼굴들을 떠올려 본다.
새 전문 탐사관으로 별명이 '낙동강 하구 부시맨'이라는 김시환 씨는 "YWCA에서 봉사활동 하다가 '습새'와 연애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평교사로 퇴임한 지가 10년이 넘은 전흥 씨는 2007년과 8년엔 습새 대표도 맡은 바 있다는데 "박중록 선생이 연 자연학교에서 많이 배웠다"며 2002년 "자연이 숨 쉬는 곳"인 진우도에서의 첫 하룻밤을 추억하기도 했다. 국제신문에서 여러 부서장과 대기자를 거친 박창희 씨는, 나중에 알고 보니 <낙동강을 따라가 보자>(2002), <을숙도, 거대한 상실>(2009) 등의 환경 관련 책을 썼다.
KNN 기자이자 다큐영화 감독인 진재운 씨는 2002년부터 '습새'의 자문위원이었고 그가 연출한 다큐 영화 <위대한 비행>(2012)은 도요새의 3만 km 여정을 따라가며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했다. 그 작품이 그해 BIFF에도 초대되고 세계자연야생생물영상제에서 아시아·오세아니아 부문 대상을 받은 것은 내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그날 일행 중 가장 젊은 멤버는 습지생태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석사 과정 대학원생 최지은 씨였고, 박중록 선생을 제외하면 '습지'와 가장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멤버는 교사 김옥이 선생과 그의 남편 김해창 경성대 교수였다. 두 부부는 그 이름도 유명한 환·생·교의 창립 멤버로서 오랜 세월 환경 운동의 일선을 함께 한 운동가인 것이다. 탈핵 운동의 이론가이자 실천가인 김해창 교수가 최근 <작은 것이 아름답다-슈마허 다시 읽기>를 펴낸 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젠 그날 진우도에서 보낸 한 나절의 몇 장면을 떠올려 보기로 하자.
"아, 저건 종다리 소리 .....
아, 저기엔 고니 두 마리 ..... "
공식 자료에 따르면 진우도는 '낙동강 하구 말단에 형성된 무인도로서 강서구 신호동에 위치한 천연기념물 제179호 문화재보호구역'으로서 '북측 해안은 갯벌이 형성되어 있는 반면, 남측 해안은 모래사주가 형성되어 있는 섬'이다. 그러나 이런 소개는 그저 소개일 따름이다. 진정 진우도를 알려면 최소한 거기에 가 봐야 하고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져야 할 터다.
"아, 저건 종다리 소리. 들리지요?"
진우도에 펼쳐진, 하얗게 반짝이는 띠풀 지대를 지나는 동안 박중록 선생이 문득 말했다. 나는 흰 구름이 떠 있는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종달새도 보이지 않았다. 정녕 사랑하는 자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것이 자연이고 자연의 소리인 것이다! 그래도 심심찮게 유유히 나타나는 검은 빛깔의 새매는 나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는데 다른 일행은 보았다는 황조롱이는 그러지 못했다.
"어제는 고니를 아흔한 마리 발견했습니다."
최근 고니는 몇 마리나 확인했는지를 묻는 박중록 선생에게 이렇게 대답한 이는 새 탐사관 김시환 씨였다. "아흔한 마리요? 어떻게 그 수를 정확히 셀 수 있지요? 공중에 나는 새를?"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그들 '습지와 새들의 친구'들은 오랜 세월, 낙동강 하구로 날아오는 수 천 수만의 새들을 만나고 관찰해 왔다는 사실을 나는 깜빡 잊은 것이다. 해가 다르게 그 수가 점점 줄어드는 철새들을 아픈 가슴으로 맞아야 했을 그들이었다.
하지만 진우도에 생명 있는 것이 어디 새 뿐이랴. 10센티 길이의 줄장지뱀 한 마리를 손바닥에 모셔 올려놓고는 우리에게 보여준 이는 진재운 기자였다. 그는 무려 6개월을 진우도에서 살면서 섬의 생태계를 탐사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붉은 색의 작은 집게 (집 부엌에 들어와 음식물을 훔쳐 먹는다고 '집'게란다)를 내 눈에 들어오게 한 이도 그였는데 보아 하니 집게를 모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멧돼지가 파헤친 웅덩이, 고라니가 싸 놓은 똥 (그 똥의 색깔과 무른 정도로 짐승의 건강 상태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 이는 누구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난 모래밭. 끝이 없을 듯 이어진 모랫길을 우리는 맨발로 한참을 걸었다. 바다로부터 바람은 쉼 없이 불어오고, 햇살 또한 쉼 없이 산산이 부서지고, 간간이 금모래도 반짝이는 인적 없는 모랫길은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게 마련이라 했던가. 바닷가엔 플라스틱 제품 쓰레기들이 즐비했으니, 오, 악마의 플라스틱이여, '플라스틱 오션'이여, 나뿐 아니라 다들 마음 속 깊이 탄식했음에 틀림없다.
금강산도 식후경, 점심때가 되어 각자 싸온 김밥이며 김치며 떡과 과일을 내 놓으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로선 '습지와 새들의 친구'와 함께 하는 첫 식사라서 더 그랬을 것이다. 나는 진우도 오기 전 '습새' 홈페이지를 살펴보았는데, 밥을 먹으면서 거기에 기록된 '습새'의 올해 활동 일지를 간간이 떠올렸다.
6월은 내성천, 7월은 천성산, 9월은 다시 내성천......
눈부신 '습새'의 활동 일지
"구름 잔뜩 낀 (날 ……) 모두 40종, 395마리의 새들을 만났고, 왜가리가 49마리로 가장 많았고, 참새 46, 방울새 귀제비 뱁새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왜가리는 덩치가 크고 물가에 있어 그 모습이 눈에 잘 띄는데 반해, 참새 뱁새 등은 작고 수풀 속에 살기에, 구석구석 빠지지 않고 살폈다면 그 숫자가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 흰목물떼새와 꼬마물떼새, 새끼를 잘 키워낸 모습, 오랜만에 만난 밀화부리 새끼들과 함께 있는 모습, 번식 후 깃털갈이로 폼을 구긴 원앙의 모습 인상적이었고, 호랑지빠귀 소리 처음 들었습니다." (6월 30일, 내성천 영주댐 상류부 조사)
7월, 천성산에서 "흰물떼새와 호반새를 처음" 만났다는 '습새'는 9월이 오자 다시 내성천을 탐사했다.
"내성천 9월 조사는 그야말로 감탄의 연속이었습니다. 영주댐이 물을 채우지 못하자 주변의 논밭이 습지로 복원되고, 습지가 살아나자 이곳을 삶터로 하는 새들이 돌아 왔습니다. 돌아 왔는데 그 규모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합니다."
그 '어마어마'한 장면 하나를 '습새'의 친구들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제비가 쉬어갈 잠자리를 찾았습니다. 최소 3만 마리입니다. 우와~ 이 광경은 정말 굉장하였습니다. 해질녘, 정확히는 해가 지고 어두워지기 직전 버드나무 숲으로 들어오고, 해 뜰 기미가 보이면 다시 날아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 모습, 정말 굉장하였습니다. 6,70년대 서울 태릉의 배 밭에서 수만 마리의 제비가 머물곤 하였는데 이후 다 사라지고 그 후 이런 큰 규모는 처음입니다. (……)"
풀밭에서의 식사가 끝났을 때 다른 누구에게보다 내게 멋진 선물을 선사한 이는 박중록 선생이었다. 그는 일행에게 다음과 같이 한 마디 지엄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자, 지금부터는 자유 시간인데요, 반드시 혼자 따로 떨어져 노니십시오. 모일 때가 되면 제가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보물찾기라도 하란 말이지요?" 누군가가 농을 던졌는데, 새삼 둘러보니 넓은 풀밭으로 드문드문 서 있는 녹색의 키 작은 소나무들, 멀리로는 길게 누운 회색의 아파트 단지, 다른 방향 더 멀리로는 바다, 바다 너머로는 낮게 엎드린 섬, 섬 너머로는 다시 흰 구름 떠 있는 하늘, 하늘, 하늘………!
나는 풀밭을 슬금슬금 가로질러 가다가 맘에 드는 소나무 한 그루 곁에 벌렁 드러누웠다. 햇살, 구름, 바람, 그리고 드높이 떠 비상하는 새들, 아직은 잘 들리지 않는 새들의 노래……에 나는 내 몸과 마음을 내 맡겼다……. 그것은 도시의 일상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습새'의 친구들이 내게 준 최상의 선물이었다.
아, 얼마만인가, 대지에 몸을 누이고서 망연히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다니! 무릇 천·지·인이 하나라는 진실을 내 이제 알겠다, 어쩌구 생각타가 잠이 들었나 보다. 어디선가 호각 소리 같기도 하고 고동소리 같기도 하고 새의 소리를 흉내 낸 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의 주인공은 박중록 선생이었다. 다들 지평선 혹은 나무 뒤로부터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다시 수풀을 헤치며 걷다가 오전과는 다른 쪽의 해변에 닿았는데, 수평선 위로 납작하게 엎드린 섬을 만원경으로 살피던 김시환 탐사관과 박중록 선생이 작은 탄성과 함께 새의 발견을 알렸다. 나는 대단한 무언가를 기대하며 만원경에 눈을 갖다 대었다. 하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고니 두 어 마리뿐이었다. 아까 '낙동강 부시맨' 김시환 탐사관이 이미 아흔한 마리나 확인했다는 그 고니 아닌가. 뭐, 탄성까지야, 하는데 만원경을 이어 차지한 김해창 교수가 말했다. "큰고니도 있고, 청둥오리도 있고, 제갈매기도 보이는데요." 좀 머슥해진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유유히 비행하는 또 한 마리의 새매가 눈에 들어왔다. '어이, 나야 나.'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생명의 무게는 한 마리나 천 마리나 꼭 같은 거야…….'라고.
이윽고 진우도를 떠날 때가 왔다. 박동욱 선장의 배가 물살을 가르며 나타났다. 박 선장은 올 때와는 다른 물길을 택해 천천히 달렸는데, 썰물 때가 되어 수심이 얕아졌기 때문이라 했다. 스크루가 강바닥 모래에 닿는 소리도 났다. 아무튼 배도 선장도 자연의 이치에 순응할 줄 아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중록 선생과 김해창·김옥이 선생 부부, 그리고 내가 그냥 헤어지기 못내 아쉬워 다대포 바닷가로 향한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개발 광풍이 비껴가지 않은 다대포는 옛 다대포가 아니었다. 하지만 옛부터 다대포의 한 명소가 되었다는 '할매 시락국밥집'에서 막걸리를 한 잔 하며 나눈, 새와 습지와 생명에 대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을 듯 이어졌다는 건 말해 두고 싶다.
나는 지구 생태계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사람이다. 지구라는 아름다운 생명체를 착취하는데 골몰해온 인류 문명의 역사, 그 폭주하는 기관차는 거대한 파국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마냥 넋을 놓고서, 손을 놓고서 파멸의 도래를 기다려도 되는 것일까?
'새가 사라지면 인간도 죽는다'는 말은 시적 은유에 머물 수 없는 말이다. 정말이지 어느 날부터 낙동강 하구로 새 한 마리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런 상상 자체가 하나의 악몽이다.
자연 생태계의 파괴하는 전지구적 자본의 논리, 개발지상주의의 골리앗적 위력에 비하면 '습새'는 줄장지뱀이나 꽃 한 송이처럼 작고 약해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있다. 그것은, 미구에 닥칠지 모를 악몽을 직시하고 작으나마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멈추지 않는 '습지와 새의 친구'들이 없다면, '새들의 세상'으로 표상되는 '공생의 세상'에의 꿈이야말로 인류가 포기해서는 안 될 마지막 꿈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그들마저 없다면 그보다 더한 끔찍한 악몽도 없으리라는 것이다.
<해강고 교사·'교사탐구 1, 2, 3' '나는 왜 교사인가' '세상의 교사로 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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