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道无知)의 채근담 읽기 (82) - 대숲을 지나는 바람처럼, 찬 연못 위를 나는 기러기처럼 …

허섭 승인 2021.03.22 15:31 | 최종 수정 2021.03.24 21:02 의견 0
겸재(謙齋) 정선(鄭敾 조선 1676~1759) -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79.2×138.2), 리움미술관

082 - 대숲을 지나는 바람처럼, 찬 연못 위를 나는 기러기처럼 …

성긴 대숲에 바람이 불어오나 
바람이 가고나면 대숲은 소리를 지니지 않고

깊은 연못 위로 기러기가 날아가나 
기러기 가고 나면 연못은 그 그림자를 담지 않는다.

따라서 군자는 일이 다가오면 비로소 그 마음을 내고 
일이 떠나가면 마음도 곧 따라 비운다.

  • 疎竹(소죽) : 드문드문 난 대나무 숲.  疎는 疏와 동자(同字)이다.   疏外/疎外(소외)
  • (안) : 기러기.   
  •  * 雁行(안항) : 형제자매들 간의 순서. 기러기가 날아갈 때에 줄 지어 날아가는 모습에서 동기(同氣)들 간의 순서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게 됨.
  • 留(류) : 머무르다.    滯留(체류)
  • 度(도) : 건너다. ‘법도 도 / 헤아릴 탁’ 으로도 읽음, 여기서는 渡(건널 도)와 같음.
  • 事來而心始現(사래이심수현) : 일이 오면 비로소 마음이 나타나고(마음을 나타내고).
  • 始(시) : 처음, 시작, 근원 / 비롯하다 / 비로소.  여기서는 부사로 쓰인 것이다.
  • 事去而心隨空(사거이심수공) : 일이 지나가면 마음도 따라서 비우게 된다. 즉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 隨(수) : 따르다 / 따라.  여기서는 부사로 쓰인 것이다.
082 이방응(李方膺 청 1697~1756) 유어도(游魚圖) 123.5+60.3 북경고궁박물원
이방응(李方膺, 청, 1697~1756) - 유어도(游魚圖)

◆ 출전 관련 글

▶『장자(莊子)』응제왕편(應帝王篇)에

至人之用心若鏡 - 그윽한 이의 마음씀은 거울과 같다

至人之用心若鏡(지인지용심약경). 不將不迎(부장불영), 應而不藏(응이부장). 故能勝物而不傷(고능승물이불상).

- 지인이 마음을 쓰는 것은 거울과 같다. 사물을 보내지도 않고 맞이하지도 않으며, 받아들이되 잡아두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라도 이겨내지만 스스로 상처입지 않는다.

▶『장자(莊子)』덕충부편(德充符篇)에

明鏡止水(명경지수) -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 이 두 가지는 사물을 잘 비추므로 사념(邪念)이 없는 깨끗한 마음에 비유해 쓰는 말임.

仲尼曰(중니왈) 人莫鑑於流水(인막감어유수) 而鑑於止水(이감어지수) 惟止能止衆止(유지능지중지).

-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들은 흐르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멈추어 있는 물을 거울로 삼는다. 오직 멈추어야 능히 뭇 멈춤(멈추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멈추게 할 수 있다’라고 했다.

▶『금강경(金剛經)』의 요지(要旨)

應無所住而生其心(응무소주이생기심).

- 마땅히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걸림이 없는) 그 마음을 내어라

▶천의의회(天衣義懷) 선사(禪師)의 게송(偈頌)에

雁過長空(안과장공) 影沈寒水(영침한수). 雁無遺蹤之意(안무유종지의) 水無留影之意(수무류영지의).

- 기러기 머나먼 하늘을 나니, 그림자 차가운 물에 잠기네. 기러기 자취를 남길 뜻 없고, 물은 그림자 잡아둘 마음 없네.

◇의회(義懷 993~1064) 선사 : 절강(浙江) 악청(樂清) 사람으로 속세의 성은 진(陳)이다. 송(宋)나라 때의 고승으로 운문종(雲門宗)의 4대 조사(祖師)이다. 집안이 대대로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어렸을 때 배 말미에서 부친이 잡은 고기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도로 풀어주곤 했다 한다. 성장 후 출가하여 고소(姑蘇-지금의 소주蘇州)의 취봉(翠峰)에서 설두중현(雪竇重顯)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에 무위군(無爲軍) 철불사(鐵佛寺)와 월주(越州) 천의산(天衣山)에서 머무르며 불법을 펼쳤다. 세간에서는 ‘천의의회(天衣義懷)’ 로 불리우고, 시호는 ‘진종선사(振宗禪師)’ 이다. 법어(法語)로 《천의의회선사어요(天衣義懷禪師語要)》가 있다.

위의 본문은 주객(主客)을 서로 바꾸어 아래와 같이 옮겨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 대숲을 지나가는 바람은 소리를 남기지 않고
     찬 연못 위로 날아가는 기러기는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 채근담 제82장과 그 궁극의 의미(奧義오의)

필자가 『채근담』이라는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초년생인 스무 살 무렵으로 기억한다. 유송월 스님이 편찬한 『선 명구 200선(禪名句二百選)』이라는 세로쓰기로 된 책의 제37쪽에서 <풍래소죽(風來疎竹)> 이라는 제목으로 바로 채근담 전집 제82장의 이 문장을 만났던 것이다. 곧장 구내서점으로 달려가 조지훈 선생이 번역한 현암사(玄岩社) 판(版) 『채근담』을 사서 펼쳤더니 그 첫 페이지에 이 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채근담이라는 책은 20대가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좋고 나쁨’ - 호오(好惡)와 ‘옳고 그름’ - 시비(是非)를 명확하게 가르지 않고 이럴 땐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럴 땐 저렇게 이야기하고 심지어 한 문장에서 서로 모순되는 내용까지 있었기에, 어린 소견에 ‘내가 뭐 이런 처세서(處世書)를 읽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어 곧 이 책을 집어던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만50세에 교직을 그만두고 50대 중반을 지날 즈음에 하릴없는 나의 백수 신세를 딱하게 여긴 친구가 자기 직장의 공부 모임에 강사로 초청하며 동양고전을 강독했으면 하기에 그 교재를 <논어> 나 <노자> 로 할까 하다가 딱딱한 경전보다는 <채근담> 과 같은 잠언서(箴言書)가 조금은 가벼울 것 같아 이를 교재로 선택하고 나도 한번 공부 삼아 번역해 보겠다는 생각을 내게 되었던 것이다. 

<채근담> 을 강독하면서 기존에 출간된 여러 번역서들을 참고하게 되었고, 일찍이 만해 한용운 선사가 <정선강의 채근담> 을 편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지훈 선생이 다시 채근담 번역에 도전한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되었으며, 조지훈 선생께서 이 제82장을 <지훈본 채근담> 의 첫 장으로 배치한 그 의도와 까닭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게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채근담 전체의 주제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바로 이 제82장을 지목할 것이다. 이것이 지훈 선생과 내가 일치한 공감의 증표이다. 

물론 이와 같은 동일한 주제가 후집 제63장에 다시 나오는데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竹影掃階塵不動(죽영소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월천담저수무흔)
대나무 그림자는 섬돌을 쓸어도 먼지 한 점 일지 않고, 달빛은 연못 바닥까지 비추어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禪名句二百選』에는 바로 이 문장이 제38쪽에 나오는데 그 출전을 <괴안국어(槐安國語)>로 밝혀두고 있다. 채근담의 저자인 홍자성은 불교 서적들도 많이 읽었으며 말년에는 불가에 몸을 의탁하면서 <선불기종(仙佛奇蹤)> 이라는 도교와 불교에 관한 책을 직접 집필하기까지 하였으니 선어록(禪語錄)을 읽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괴안국어> 라는 책은 일본의 임제종을 중흥시킨 백은 선사(白隱慧鶴 1685~1768)가 지은 책으로 백은 선사는 홍자성보다 후대의 사람인 셈이다.

하여튼 내가 말하고자 하는 종지(終旨)는 - 단언(斷言)컨대 '채근담의 제82장을 읽고 그 궁극의 의미를 이해하였다면 채근담의 나머지 문장들은 읽을 필요도 없거니와 만일 읽었다면 다른 문장들은 모두 잊어도 좋다'는 것이다. 

*『禪名句二百選』  柳淞月 選解  홍신문화사(弘新文化社)  1979년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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