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마 이야기 (83) - 두 분 교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엄마
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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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5 15:31 | 최종 수정 2021.04.0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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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학위를 받으면 대학 교수가 되는 길이 순탄할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 힘들고 고달팠다. 지원하는 대학마다 떨어졌다. 떨어질 때마나 지원한 대학에서 편지가 왔다. 위로삼아 보내는 것이겠지만 받으면 더 침울해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암울하며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시간이 이어졌다. 33번이나 떨어졌다. 내 나이 44살이 되었다.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거의 포기하려고 할 무렵 신문에서 우연히 교수초빙 공고를 또 보았다. 해보나 마나 또 떨어질 걸 하면서 지나치려다가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지원했다. 또 떨어지면 내 나이 45살이 되는데 다른 살 길을 모색하겠다는 심정으로.
매일 아침 집안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며 찬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머리에 대고 “하나님, 무조건 살려주세요”라고 매달렸다. 기도가 아니라 읍소였다. 그런데 정말 하늘이 도우셨는지 34번 만에 희소식이 왔다. 2004년 2월 10일 10시 10분의 전화. 아직도 나는 그 시간을 잊지 못한다. 경성대학교가 은혜롭게 나를 받아준 것이다. 나는 감읍(感泣)하였다. 알고보니 경성대학교는 공정한 교수채용을 하는 대학으로 알려진 훌륭한 대학이었다. 가장 기뻐하실 분은 엄마와 아버지였다. 가장 먼저 전화를 드렸다.
내가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학과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행한 공개강의에서 나를 잘 보아주셨던 이의자 교수님과 황지영 교수님 덕분이었다. 드디어 나는 임명장을 받고 교수가 되었다. 엄마가 난생 처음 내 연구실로 오셨다. 나는 엄마에게 내가 교수가 된 것은 내 연구실 옆방의 교수님들 덕분이라고 말씀드렸었다. 엄마는 못난 아들을 구해주신 교수님들께 진정한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엄마의 평생 좌우명은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사는 것이다. 나는 엄마와 함께 이의자 교수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이의자 교수님은 처음 보시는 울엄마를 정겨운 마음으로 맞아주셨다. 나는 엄마와 함께 황지영 교수님 연구실 문도 두드렸다. 황지영 교수님도 처음 보시는 울엄마를 정겨운 마음으로 맞아주셨다. 나는 너무너무 고맙고 아직도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산다. 엄마는 늘 두 분 교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살라며 지금도 늘 아들에게 당부하는데 나는 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살지 않으니 나는 참 못된 불효자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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