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땅끝마을에 있는 땅끝항에서 보길도 가는 배에 승용차를 싣고 떠난다.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대가 산 위에서 굽어보고 있다. 또한 보길도는 노화도를 거쳐 다리로 연결되어서 차로 둘러볼 수 있어 노화도 선착장에 내린다.
우리는 큰 배로 30여 분만에 도착이 가능한 곳이다. 30분 간격으로 배가 떠나는 시간표를 보니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옛날 윤선도는 제주도를 향해가다 태풍을 피해 들른 곳이 보길도라는데, 그때는 무슨 배로 어떠한 방법, 얼마 동안에 걸려서 보길도에 닿았을까? 아마도 제주도로 가던 길이었다니 차비를 단단히 하였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는 이곳을 윤선도 일행도 지나갔으리라! 여기저기 섬들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남도의 섬은 우리나라 섬 대부분이 분포되어 있다. 노화도 선착장에 내려서 차로 달린다.
1990년대 초에 내가 일한 불교 포교사 모임에서 보길초등학교 예송분교와 자매결연을 맺었었다. 부산에서 여름방학이면 분교에 와서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학생들과 학부모들과 어울렸다. 한 번씩 부산에 초청하여 부산을 구경시켜 주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많은 열정이 있었고, 참 잘한 일이라 뿌듯한 보람을 느끼고 했는데, 그 열정을 어디로 갔을까?
잠시 생각에 잠기는 동안 노화도를 거쳐 보길대교를 건너가고 있었다.
우선 보옥리에 있는 보옥민박에다 완도에서 싼 고기와 전복을 냉장고에 넣어 놓고, 다시 길을 나섰다.
곡수당과 낙서재를 찾아간다. 가는 길에 낙서재 건너편 산 중턱에 고산이 책을 읽었다는 동천석실이 보인다. 낙서재는 3칸 집인데 고산이 말년에 지낸 곳이다. 귀암에 앉으니 그의 숨결이 느껴진다. 곡수당은 그의 아들 학관이 지내던 곳이라 낙서재 아래에 자리를 하고 있다. 고산이 가장 많이 거닐고 사색을 했을 것이다. 마음에 담으며 거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예송리 해수욕장으로 간다. 하늘에 구름이 아름답게 떠 있다. 이런 날에 보길도에 맞이하다니 여행에 행운이 올 것 같다.
예송리는 보길도 동남쪽에 위치해 상록수림이 바다를 활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다. 작은 갯돌이라는 검고 푸른 조약돌이 깔려 있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자르르! 자르르!’ 거리고, 나갈 때면, ‘쏴아! 자그르르!’하고 다시 갯돌 소리가 귀를 건드린다. 갯돌 소리를 듣는 내내 마음이 청결하게 씻기는 기분이다.
예전에 왔을 땐, 저녁에 듣던 갯돌 소리가 다시 환청처럼 되살아난다. 한 무더기 관광버스 탐방객들이 어린아이들처럼 웃음을 보태놓고 간다. 바다는 수심이 깊어 바다 쪽에는 배들이 군단을 이루고 있다. 미역과 다시마, 전복 양식을 하는 배들인 것 같다. 이곳의 특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윤선도의 자취를 찾아 나선다.
‘보길도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역사유적이 잘 어우러진 명승으로 격자봉(해발 435m)을 중심으로 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는 계곡 주변의 부용동 지역에 원림문화가 형성되었다. 고산 윤선도(1587~1671)는 해남에 있을 때, 병자호란의 소식을 듣고 강화도에 도착하였으나, 인조는 이미 남한산성에서 적에게 항복한 이후였다. 이에 고산은 세상을 버리고 제주도(탐라)로 가는 길에 보길도의 경치에 취하여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고산은 보길도 내 경관이 수려한 곳곳에 경처를 명명하고 그곳을 오가며 성정함양과 작품활동을 하였다. 또한 부용동은 그가 13년간 오가며<어부사시사> 등 시가를 창작한 국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다. 고산은 노년을 자연과 산수를 노래하다가 85세(1671)로 낙서재에서 일생을 마쳤다. 보길도 부용도원림(명승 제34호)은 세연정을 비롯하여 최근 복원된 곡수당, 낙서재, 동천석실 등에 고산의 경관의식과 자연에 순응하는 전통적 조경 수법이 내재한 조선 시대 대표적 원림유적이다.’(보길도 원림 안내문 참조)
보길도는 원림은 가산, 흑약암, 사투암, 세연정, 비흥교, 세연지, 방도, 서대, 회수담, 동대, 판석보, 옥소대로 꾸며진 유적이다. 또한 고산 윤선도를 빼고는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다. 그의 발자취는 오늘날까지 보길도 사람들에게 여행 상품을 확보해 준다. 여행객이 여름에는 많이 와서 생활에 영향을 톡톡히 끼치고 있다.
윤선도는 보길도에 머물면서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면서 국문학사적으로 뛰어난 어부사시사를 풍류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어부의 삶을 남겼다. 봄(춘사), 여름(하사), 가을(추사), 겨울(동사) 사계절을 노래한 각 10수씩 40수를 노래해 우리는 교과서에서 만났다.
또한 오우가는 물, 바위, 소나무, 대나무, 달을 여섯 벗으로 의인화하여 노래한 시조로 누구든지 들어본 듯한 시조이다. 오우가를 따라 읽어본다.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구름빛이 깨끗다 하나 검기를 자주한다/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많노매라/깨끗고도 그칠 이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아마도 변치 않을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구천(九泉)에 뿌리 곧은 줄을 그로 하여 아노라//나모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밤중에 광명이 너만 한 이 또 있느냐/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오우가 전문>
지금 읽어도 감각이 뛰어난 작품이다. 만흥(漫興) 6수 또한 전원시이다.
세연정 주위를 둘러본다. 날렵한 정자의 모습이 위치한 자리도, 어우러진 나무와 갖가지 꾸밈이 아늑하고 정서적인 안정을 하게 해주는 느낌을 받는다.
세연지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윤선도의 오우가를 다 읊은 것 같다. 문학관에서 다시 그의 생애와 작품 하나씩 훑어본다.
날이 저물어 간다. 이제 땅끝 전망대에서 보길도에서의 일몰을 감상하러 간다. 그런데 구름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
민박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전복을 치즈를 발라 익혀서 술안주로 하여 여행의 밤을 보낸다. 내일 아침을 꿈꾸며 잠자리에 든다.
아침에 일어나 공룡알 바닷가로 나가본다. 산굽이 너머 수평선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다. 언제나 일출을 바라보는 마음은 새롭고 경건해진다. 몽돌의 모습이 햇살에 비추는 모습이 아름답다. 물비늘이 반짝이면서 아침을 말갛게 해준다. 오래도록 앉아 있고 싶다. 깊이 숨을 들이 마신다.
보옥민박에 오니 공룡알 해변의 공룡알은 민박집 정원에 가득하다. 서로 마주 보면서 웃음을 씨익 날린다.
<글, 사진 = 박홍재 객원기자, taeyaa-park@injurytime.kr>
◇박홍재 시인은
▷경북 포항 기계 출생
▷2008년 나래시조 등단
▷나래시조시인협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원
▷오늘의시조시인회의회원
▷세계시조포럼 사무차장(현)
▷부산시조시인협회 부회장(현)
▷시조집 《말랑한 고집》, 《바람의 여백》
▷부산시조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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