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45 봄날은 간다 - 청동기(靑銅器) 시대의 사내가 되어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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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6 14:38 | 최종 수정 2021.05.1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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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휘움한 고갯마루로 청동기의 사냥꾼이 돌화살을 쏘면서 노루를 쫓았으리라. 삼국유사의 마을에서 걸어나온 사내가 나무를 하러가고 <청산에 살으리랏다>의 고려처녀가 머루랑 다래를 따고 또 한참 세월이 흘러 폐병으로 군에도 못 간 보릿고개의 노총각이 어떻게든 살아보려 뱀을 잡으러 나섰다가 피보다도 붉은 황토 흙에 피를 토하고 죽고 그가 흥얼거리던 <유정천리> 가락이 낙화처럼 바람에 흩날리고... 그리고 오는 내가 이 숲에 앉아 있고...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신라의 노란 햇살도, 풀잎에 고이는 고려의 휘움한 어둠도, 산새소리가 멈춘 적막도, 수런대며 일어나는 풀벌레의 울음도, 동학농민운동 때 흰 수건 동여매고 죽창 들고 일어난 민초(民草)들의 아우성도 이 숲 어딘가 고여 있으리라.
그 많은 세월이 흘러도 이 햇빛과 바람과 적막이 여전히 투명하고 산뜻하고 고요하다는 것은 그들이 아무것도, 그 애잔한 눈빛이나 숨소리 하나도 가져가지 않고 오롯이 이 숲속에 걸어두고 갔기 때문일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황홀한 한 나절을 보내는 걸까?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싱그러운 숲의 향기가 퍼지는 걸까?
사진은 명촌리 사광마을의 대숲을 베어내고 조성하다 발견된 움집터 등 청동기시대 유적.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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