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Wild 지리산 1000일’ 제작·감독 백한기 사진작가 인터뷰
그가 지리산에 틀어박혀 산다는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자연 다큐멘터리 ‘와일드Wild 지리산 1000일’을 제작하고 있다지 않은가! 일간지 사진기자를 은퇴한 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인생2막을 시작한 백한기(57·전 국제신문 사진기자) 사진가 얘기다.
지난주 자동차를 몰고 지리산 100번지를 향했다. 백 작가의 스튜디오 겸 작업실이 있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금계리 옛 의탄초등학교의 지번이다. 지리산 둘레길 출발지로도 이용되는 폐교 운동장에 도착하자 그가 산에서 촬영을 마치고 막 돌아와 기다리다 반갑게 맞아주었다. 머리칼은 헝클어지고 얼굴은 흙색으로 탔지만 표정은 청년처럼 맑고 밝았다.
백 작가는 땡볕을 피해 곧바로 자신의 스튜디오 겸 작업실로 이끌었다. 작업실은 폐교의 교실 한 칸을 임대해 쓰고 있었다. ‘지리산 100번지/갤러리·스튜디오’란 명패가 달린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지리산 숲속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교실 벽면은 지리산의 주인인 야생동물과 풍경 사진으로 가득했다. 반달곰, 멧돼지 가족, 담비, 오소리, 너구리, 삵 등이 손을 뻗으면 금방 달아날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교실 동쪽 벽면에 걸린 대형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포스터는 야간에 찍은 삵 사진 바탕에 ‘Wild 지리산 - 1000일의 기록’이란 글씨를 합성한 것이었다. 미리 보는 자연 다큐멘터리 개봉 포스터인 셈이다.
우선, 언제부터 이 작업을 시작했는지 궁금했다.
“정년퇴직하고 일주일쯤 있다 바로 지리산으로 왔어요. 그러니까 9월 말까지 회사 근무하고, 10월 9일에 지리산으로 왔네요. 벌써 2년이 다 되었는데, 12일로 꼭 675일째입니다.”
퇴직하자마자 결행한 걸로 봐서 미리 구상과 준비를 하셨나 봅니다?
“그렇죠. 기자시절 야생조류와 동물 사진을 많이 찍다보니 이들을 영상에 담아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군요. 일종의 꿈처럼요. 그러다가 정년퇴직을 3년쯤 남겨두고 결심을 했죠. 자연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요.”
‘와일드 지리산 1000’의 내용을 물었다.
“말로 하자면 간단합니다. 아름다운 지리산 국립공원의 4계, 그곳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과 인간과의 갈등과 공존의 이야기입니다.”
품이 넓은 지리산을 무대로 어떻게 작업하는지 궁금했다.
“작업은 무인카메라와 직접 촬영으로 이뤄집니다. 지리산 전역에 16대의 자동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3대를 제외한 13대는 보통 1개월마다 배터리와 메모리 교체하면서 촬영상황을 확인하고 편집합니다. 사실 고성능 카메라 3대가 핵심인데, 이것은 매일 배터리를 교체하고 확인합니다. 새벽부터 오전 10시 이전까지 이 작업을 합니다. 매일 서너 시간 깊은 숲길을 걷는 게 일상이죠. 이것도 위장막 촬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작업실 창문으로 구름의 그림자에 걸린 천왕봉이 보였다. 여기는 지리산 계곡 중에서도 깊고 길기로 유명한 칠선계곡 입구다.
백 사진가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지리산에서 자연 다큐멘터리 촬영이 공기 좋고 물 맑은 계곡에서 신선놀음처럼 보일지 모르겠는데, 실생활이 참으로 만만찮습니다. 야생동물은 워낙 민감한 녀석들이라 촬영하는 데는 `보안'과 `정숙'이 생명입니다. 더러 위장막 안에서 몇날 며칠을 새야 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녀석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 곳곳에 무인카메라를 놓고 이동경로나 먹이활동 등을 24시간 모니터링 해야 합니다.”
수십 차례 실패한 끝에야 비로소 한두 번 야생동물과 조우하는 행운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 행운도 온전히 촬영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영상으로 담은 것을 묻자 백 작가는 “다행히도 지리산은 나의 수고를 배신하지 않더라”면서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었다.
백미는 지리산 4계절 담비 영상. 지리산 모봉우리 모처에 꿀을 발라 담비를 유혹했는데, 담비 가족 3마리가 나타나 꿀을 먹고 노니는 모습이었다. 지리산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담비는 정말 생동감이 넘쳐보였다.
담비 외에도 반달가슴곰 노루 오소리 멧돼지 고라니 삵 너구리 등의 진귀한 장면을 담아냈다.
야생동물은 먹이를 쉽게 구하기 위해 민가로 내려온다.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인 담비는 벌꿀을 좋아해 양봉 꿀을 훔치는가 하면 멧돼지와 노루는 농민이 일궈놓은 밭을 망가뜨린다. 족제비가 농장에 숨어들어 달걀을 훔치는 장면은 마치 완전범죄를 꿈꾸는 도둑처럼 조심스럽다.
촬영의 어려움을 묻자 백 사진가는 “사람 찍기가 더 어렵다”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말이냐고 재차 물었다.
“지금 촬영하는 다큐는 ‘지리산 품에 안긴 동물과 인간의 갈등과 공존’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동물은 육체적으로 어렵지만 극복하고 성과도 많이 거두었어요. 그런데 지리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를테면 약초꾼 등은 카메라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통에 지금 애를 먹고 있습니다. 주로 어르신들은 ‘영업비밀’ 노출 염려, 젊은이들은 자격지심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술을 함께 마시며 친해지려 애를 쓰고 있는데...”
‘지리산 품에 안긴 동물과 인간의 갈등과 공존’이란 주제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백 작가는 “인간과 자연(환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생의 관계이다. 지리산에 사는 모든 생물은 존중받아야 한다”며 “우리는 매순간 환경이 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나날이 동식물들의 공간을 잠식하는 통해 동식물들이 막다른 길에 내몰려 화가 많이 나 있다는 것이다.
백 작가가 담은 영상은 사진으로 치면 50만 장 정도. 촬영 작업이 반환점을 돈 이후부터 편집을 병행하고 있다. 2019년 10월까지 편집과 후반작업을 마무리하고 빠르면 2019년 연말쯤 ‘와일드 지리산 1000일’을 독립영화제에 출품해 시민에 선보일 계획이다.
사진기자에서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인생 2모작을 시작한 백한기 사진가. 인생 1모작(국제신문 사진기자)보다 더 의욕적인 삶을 살고 있는 백 작가에게 ‘은퇴자의 고민’은 물어볼 계제가 아니다 싶어 그만 두었다.
백 사진가는 자연 다큐 제작에 이어 ‘지리산 4계’ 사진집 출판과 ‘지리산사진박물관’ 건립도 추진한다고 귀뜸했다.
백 사진가가 찍은 사진과 영상을 보고 얘기를 나누면서 ‘Wild 지리산 1000일’의 성공을 예감했다.
작별할 때는 백 사진가는 청년 같은 미소로 우리 일행을 배웅해주었다. 그의 미소는 지리산과 그 자신의 꿈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
<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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